고산구곡가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1, 3연에서 벗을 기다리며 그 곳을 알리려 하는 등 희망적 모습을 보였으나 9, 10연으로 가서는 그 희망이 사라지며 10연 종장의 ‘遊人(유인)은 오지 아니고 볼 것 업다 더라.’를 위의 맥락으로 해석하면 자신과 함께 즐길 것을 권해도 오지 않는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1) 생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강원도 강릉 북평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俶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 신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其三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고인이 성현을 지칭한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 잘 안다. 그러므로 배운다는 것은 성현이 가던 길을 그대로 본받아 따르는 것이다. 진리는 내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견
㉣ 방황과 홀로서기
율곡은 나이 열 셋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문장이 날로 성취되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기대 못지않게 그의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자신을 알아준 문장가 송인(宋寅)에게 보낸 다음 글은 그의 이러한 갈등을 단적으
고산구곡 역시 구곡관련 문화의 일부를 차지하며 독자적인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
<고산구곡가>가 후대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단언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후기까지 한시 구곡시 혹은 <무이구곡도가>에 대한 차운시가 지속되었고, 게다가 구곡가사까지 등장했던 상황을 감안할 때,